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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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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했던 홍콩의 밤은 어느덧 한 달도 전의 옛일이 되었습니다.
후안 싱은 홍콩 부둣가에 나와 한 남자를 떠올립니다.
봄철의 나비처럼 날아와 물거품처럼 사라진 남자.
전화를 걸어도 묵묵한 신호음만이 그의 부재를 알릴 뿐입니다.
후안 싱은 거울처럼 밤하늘을 비춘 검은 바다를 바라봅니다. 잔잔한 파도가 이는 새카만 바다, 그리고 그 가운데의 푸른 달.
슈에 펑과 마찬가지로 존재가 잊혀진, 이름조차 없는 기울어지고 작아진 달.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달이 나지막히 후안 싱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후안 싱이 의구심을 품기도 전, 수면이 일렁이며 파도는 후안 싱을 푸른 달에게로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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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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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어디인가요?
주변을 둘러보니, 이 곳은...
그래요. 당신이 알고 있는 행성의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는 달인 것 같습니다.
항상 존재하지만, 간혹 모습을 숨겨버리곤 하는 그 곳 말이예요.
당신이 딛고 선 땅은 새하얗습니다.
근처에는 붉고 노란 갈대밭이 흐드러져 천천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달에도 바람이 불었던 가요?
주위를 둘러보던 후안 싱은, 바지 주머니 안에 무언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후안 싱: (나도 모르는 새에 약을 했나, 혹은 내가 꿈을 꾸나. 현실이라면 아주 근사하겠구나. 선주야. 네 생각 하다 내가 달까지 끌려왔단다.)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내본다.)
후안 싱, 외모 다이스를 굴려주세요.
후안 싱:
외모
기준치:75/37/15
굴림:12
판정결과:극단적 성공
후안 싱이 주머니에서 꺼낸 그것은, 작은 동전 하나입니다.
은으로 된 동전. 어쩐지 완벽한 원형이 아닙니다.
이 모양은... 이름 없는 달의 모양입니다. 온전한 원형이 아닌, 그렇다 해서 손톱 모양으로 완벽히 일그러지지도 못한 그 달.
그 때
어디선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잔잔한 파도의 소리.
바람이 갈대를 흔드는 소리.
저 멀리서 나룻배를 한 척이 보입니다.
천천히 다가오는 나룻배.
그리고 그 위에 슈에펑이 앉아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슈에 펑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낯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나요? 이렇게 마주칠 수 있던 존재였나요?
후안 싱, 이성 다이스를 굴려주세요.
후안 싱:
SAN Roll
기준치:65/32/13
굴림:93
판정결과:실패
이곳은 꿈일지도 모릅니다. 혹여는 그가 남긴 아편의 향에 취해 보는 환상일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던 현실이 무너지는듯한, 저 먼 바다 아래로 끌려가는 중압감이 듭니다.
후안 싱이 상황을 이해하려 할 때,
곧이어 갈대밭을 가로지른 나룻배는 후안 싱의 곁으로 다가옵니다.
슈에 펑: ... ... . (여상한 낯이다. 마치 사라졌던 것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고작 한 달도 전의 기억과 같은 모습으로 후안 싱의 앞에 선다.)
안녕, 자기야. 뜻밖의 곳에서 만나는구나.
후안 싱: (눈을 의심할까, 하면 목소리가 들리고 귀를 의심할까, 하면 바다 냄새가 선명했다.)
그러게. 상상도 못한 곳에서 만났다, 선주야. 그 배는 네 것이니?
슈에 펑: (물음에 눈동자는 아래를 향한다. 저 먼 바다를 항해하기에는 부족할 작은 나룻배. 물 한 길 없이 저를 그에게로 이끈 이 배.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주억인다.) 모든 배는 내 것이지. 잊었나봐. 네가 부름짓는 그 이름의 뜻을.
후안 싱: 하하. (생각해보니 그렇지. 이 세상 모든 배는 네 소유였지. 산 자와 사자의 것 전부.) 우리 발 딛고 서 있던 곳의 배 뿐이 아니라 달에 뜬 것 까지 사들였을 줄은 몰랐단다. (한 걸음 다가서서 묻는다.) 내 거기 올라도 되겠니.
슈에 펑: (대답 대신 그가 다가선만큼 한 걸음을 뒤로 물리면, 꼭 두 사람만이 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남는다.)
멀리 가지는 못해.
후안 싱: 신경 안 써. (나룻배의 난간을 밟고 그 안으로 훌쩍 넘어들어간다. 배는 침입으로 출렁였다.) 아이고, 작기도 하다.
슈에 펑: 네가 올 줄은 몰라, 더 좋은 배를 준비하진 못했단다. (농담처럼 하는 말에 작은 웃음을 섞어 흘린다. 배가 삐걱인다. 갈대밭이 다시끔 흔들리면 노질도 없이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조금 놀다 돌아가렴. 네 있을 곳은 이 위가 아니니.
후안 싱: 그럼 너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어? (말이 끝나자마자 문장이 이어진다. 갈대 소리가 끼어들 틈 조차 주지 않았다. 쌓여가는 부재중 속에 내리 묻고 싶던 말 이었기 때문에.)
슈에 펑: 영원을 살지. (슈에 펑의 시선은 후안 싱을 향하지 않는다. 배가 지나가며 난 자리와, 살랑이는 갈대밭을 바라볼 뿐.)
후안 싱: 이 바다와 갈대만 바라보며? (배 안의 턱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난간에 허리를 기대고 손을 바다 속으로 기울인다.) 그 지루한 영원은 누가 준 형벌이라니.
슈에 펑: (후안 싱의 손이 갈대밭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곁눈질한다.) 지루하지 않아. 나는 이곳에서 꽤 행복하단다, 자기야.
슈에 펑의 말이 끝나자, 옅은 진동소리가 들립니다.
달이 조금씩 움직이며, 별이 빼곡한 밤하늘 사이 자리한 행성, 지구의 모습이 일렁입니다.
슈에 펑: 그러니까 말이야,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다시 한 번 웃음을 흘린다.) 이곳에는 내가 간절했던게 있거든.
후안 싱: (기막히게 아름다운 꿈이라 생각한다. 아니면 환상이거나. 혹은 그 중간이거나. 세상에, 이치로만 돌아가는 일은 없기 때문에.)
(손으로 갈대 하나를 꺾어볼까, 대를 슬쩍 움켜쥐어 보며 묻는다. 시선은 당연 제 손에 가 있고.) 어지간히 간절했나보다. 이렇게 헛헛한 곳에서도 혼자서 행복할 수 있고. (무엇이냐 묻는거다.)
슈에 펑: 아직도 모르겠니. (그제서야 슈에 펑의 검은 눈동자는 제 맞은 편의 남자를 바라본다. 입은 분명 웃고 있는데, 눈 속에는 다른 감정을 품은 채로.) 나 혼자가 아니야.
그래서 나는, 네 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단다.
다시 한 번, 옅은 떨림이 느껴집니다.
하늘에 자수 놓인 별은 점점 간절한 빛을 내고, 슈에 펑은 나룻배에서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달이 크게 움직입니다. 흔들리는 나룻배. 곧이어 그것은 전복이 되고
후안 싱이 뒤집히는 배에서 떨어지기 전 본 것은, 달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형체 없는 불에 타서 무너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너를 안고 있어도 너는 여기 없고
그을음과 타고난 재만 있잖아
/
두 번째 달
/
내게 상처 주게 허락 할 테니
다시 걸어보게 해줘 사랑에
난 이미 손 쓸 수 없게 돼버렸지만
멋대로 그대를 원하고 있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냐
난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지만
눈을 뜬 후안 싱.
여전히 달 위입니다.
그러나 조금 이상합니다. 달의 표면은 아까와 다르게 붉어져 있고 주변의 갈대밭은 시커멓게 타서 재가 되어 있습니다.
후안 싱은, 바지 주머니 속에 무언가 들어있는듯한 이질감을 느낍니다.
후안 싱: (새카만 눈이 내린 것 같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내본다.)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가 발견됩니다. 은으로 된 동전. 아까와 같은 모양입니다.
후안 싱, 주변을 둘러볼까요?
후안 싱: (둘러봐야지. 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풍경이다.)
후안 싱이 걸음할 때마다 새카맣게 변한 갈대는 재가 되어 허공 중으로 흩어집니다.
그 사이,
부서지는 갈대밭 사이로, 슈에 펑의 모습이 보입니다.
슈에 펑: (타들어간 배의 옆에 앉아 두 손으로 낯을 가린 채 몸을 웅크리고 있다. 무언가를 연신 중얼거린다.)
후안 싱: (걸음을 멈췄다. 저 배는 우리가 타고 있던 것인지. 너는 무얼 그리 괴로워하는 듯 보이는지. 호기심은 순수에 가까웠을까, 고요히 다가가며 그의 뭉그러진 문장을 귀에 담으려 해본다.)
다가선 후안 싱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에 타 재가 되어 사라졌음에도
슈에펑은 마치 물에 빠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흠뻑 젖어 머리카락도, 옷도 무겁게 늘어져있습니다.
벌벌 떠는 슈에 펑의 말은 오직 단 한 마디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슈에 펑: 추워 , ....
슈에 펑은 후안 싱이 다가온 것도 모르는 듯 같은 말만을 읊조립니다.
슈에 펑: 제기랄, 추워춥다고... .
후안 싱: (미간을 조금 웅크린다. 성큼 다가서더니 입고 있던 얇은 자켓을 벗어 그의 등에 두르고 한 팔로 웅크린 몸을 덮는다.) 슈에야.
슈에 펑: (갑작스레 다가온 체온은 열병과도 같다. 흠칫 놀라 낯에서 손을 떼어내니 온통 젖어 머리카락에서 낯으로, 낯에서 턱으로 물이 뚝, 뚝 떨어진다.) 후안, 후안 싱.... 내 곡주야.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떨려 말이 끊어진다.) 이상하지, 참, 이상, 하지. 온 곳이 다 불인데, 나 혼자 이, 이렇게 추워서... .
후안 싱: 그래, 참 이상도 하다. 물 위를 노닐어야 할 네가 이리 젖어있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나 삭막한 곳에서 홀로 추워하는 것도 그렇고. (젖은 머리를 이마에서 부터 쓸어 넘겨준다. 바라보는 시선에는 명백한 웃음도 연민도 없다.)
누가 너를 빙하 아래로 떠밀었는지. 잔인도 하다. (우선은 제 품에 그를 안았다. 그냥 아주 고개 묻히도록 안고서 물기를 닦아내거나 할 수 있는 건 없을까 주변을 눈으로 긁는다.)
슈에 펑: (네가 내게 잔인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 목 깊이 새겨졌으나 정작 입 밖으로 울컥 나온 것은 폐부를 채웠던 바닷물이다. 간헐적으로 헐떡이며 숨을 몰아쉰다. 점차 떨림이 잦아들 때에서야 고개를 바로 들어 저를 안은 남자의 모습을 본다. 그의 다정이 심장을 칼로 그어내는 것만 같다.)
주변은 눈처럼 흩날리는 재와, 부서지는 갈대밭. 그리고 붉은 땅만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을 뿐입니다.
슈에 펑: 나는, ...난 죽으면 그대로 끝일 줄 알았는데, 곡주야. (그를 붙잡은 강한 손아귀가 소매자락을 구긴다.) 죄가 많아서 그런걸까? 응?
후안 싱: (무슨 상념이 그리 많은지 침묵이 잠시 늘어진다.) 너나 나나 죄가 적지는 않지. (그가 잡고 떨도록 놓아둔다. 웅크린 이의 앞에 양 무릎 꿇고, 양 팔로 끌어안았으니 남는 손이 없었다. 옷에서 바다 짠내가 났다.)
(얼음장 같은 등, 차가운 뒷목을 지나 눅눅한 뒷머리로 손길이 올라간다. 느리게 머리카락을 손 끝이 파고들면 한기에 손 끝이 얼 것 같아 우스웠다.) 쉬이 벗어날 수 있었으면 네가 그 고생을 했겠니.
슈에 펑: 나의 죄는, (나의 죄는 오직 단 하나였는데. 감히 욕심을 낸 그 죄였는데. 나룻배를 탈 때와는 여실히 다른 모습으로, 사내를 보는 눈빛이 젖어 흔들린다. 아마도 이것이 슈에 펑 본래의 모습이었으리라. 손에는 간절함이 담기고, 목소리에는 더없는 초조함이 섞여있다. 당신이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쿨럭. 한번 더 물을 뱉는다. 사내가 만지는 자리마다 열이 돌아온다.)
하지만, ...하지만 괜찮아.
이곳의 은 날 사랑해주거든. 곡주야, 알고있니? 더이상은 아니야, 더는 .... . 네게 죄를 짓진 않아.
후안 싱: (누군들 너를 사랑할 수야 있겠지만 네가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니. 이것은 오만이고 욕심이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저가 자랑스레 들고 있는 성정 아닌가. 그러니 그러한 생각에 환멸이나 수치 또한 없었다.)
(뺨을 쥐고 물었다.) 슈에펑. 내 선주야. (얼굴을 당겨 억지로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게 만들고는 파리한 눈가를 매만지며.) 그 달이 무슨 모양을 하고 있던.
슈에 펑: 네 아래를 봐, 곡주야.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붉게 오른 눈동자가 그를 주시한다.) 이 나를 부르고, 내 사랑을 보답했지. (점차 젖어들었던 옷과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말라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이 곳에 있을 수 있는거야. 추울 지라도, 행복하게. 영원 속에서.
후안 싱: 그리하여 너는 영원히 행복하겠니?
슈에 펑: ....그래.
후안 싱, 슈에 펑에게 심리학 기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안 싱:
심리학
기준치:10/5/2
굴림:46
판정결과:실패
슈에 펑: 나는 드디어 행복해졌어. 행복해질 수 있어. (끌어올린 입아귀. 남자의 소매자락을 쥔 손에 힘이 풀리며 이윽고 잡은 것을 놓아준다.) 그러니 괜찮아.
후안 싱: (그의 목소리가 그치기 전 부터 느릿하게 고개를 숙여 소리가 멎을 즈음 이마에 입술을 댄다.)
슈에 펑: (너를 사랑했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너를 '내 사랑'이라 부르며 아끼고자 했던 것은. 기어코 눈물 한 줄기가 소리없이 떨어진다.)
나는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아.
차라리 나를 죽여줘.
후안 싱에게는 그렇게 들리는 말이었습니다.
슈에 펑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달은 또 다시 크게 흔들립니다.
후안 싱에게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낸 슈에 펑는 그의 품에서 물거품처럼 흩어지고야 맙니다. 붙잡으려 해도 더욱 거품은 깨버렸습니다.
흔들리는 달의 움직임에 후안 싱의 몸조차 서서히 깨져 갑니다.
아무리 가시 돋친 말도
그렇게 날카롭지는 않지 너의 침묵 텅 빈 눈
메마른 나무 가지 같은
너를 끌어안고 서서 쏟아내고 있는 눈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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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달
/
뿌리치듯 날 밀어내 네게 다가갈 수 없는데
나는 출렁이며 차올라 네게 넘쳐버리게
무책임한 그대는 매일 얼굴을 바꾸네
내게서 도망치지 말아줘
후안 싱은 눈을 뜹니다. 여전히 달 위입니다. 아까 붉었던 표면은 잘못 본 것일까요. 다시 원래의 흰 빛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후안 싱, 이번에도 주머니 속에 무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꺼내볼까요?
후안 싱: (자신의 옷 앞을 더듬어봤다. 그를 안아 젖어있던 곳 마저 말라있을까 하고. 무엇을 찾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구태여 답을 구하진 않았다.)
(주머니를 뒤져본다.)
후안 싱의 몸은, 언제 슈에 펑을 안았었는지-혹은 그것이 정말 일어났던 일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젖은 곳 하나 없습니다.
심지어는 슈에 펑에게 건네주었던 겉옷조차 돌아와있습니다.
주머니에서 동전 세 개가 발견됩니다. 은으로 된 동전. 전과 같은 모양입니다.
후안 싱이 동전을 보고, 다시 앞을 보았을 때에는 역시나 슈에 펑이 보입니다. 그는 젖지도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후안 싱을 바라봅니다.
슈에 펑은 웬 테이블 앞에 앉아 있습니다. 서 있는 행성과 똑같은 색으로 된 하얀 대리석 테이블은 보기만 해도 차갑습니다.
테이블 앞에는 빈 의자가 하나 있습니다.
후안 싱: (손 안에서 세 개의 동전을 잘각거리며 비어있는 의자에 당연하게 앉는다.) 기다렸니?
슈에 펑: (소리없이 썩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이런 미소를 후안 싱에게 보인 적이 있었던가?)
후안 싱이 의자에 앉아, 테이블에 올려진 거울이 정확히 그를 향해 비춰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후안 싱이 거울을 바라보았을 때,
거울 속에 비춘 것은 익숙한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타인의 얼굴이었습니다.
후안 싱, 이성 다이스를 굴려주세요.
후안 싱:
SAN Roll
기준치:65/32/13
굴림:59
판정결과:보통 성공
성공. 후안 싱은 거울 속 남자의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꿈 속이기에, 혹은 환상이기에. 더욱 이상한 일이 생겨도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슈에 펑: 나 말이야, (슈에 펑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나즈막히 속삭인다.) 사랑에 빠졌어.
슈에 펑은 아무래도, 후안 싱을 다른 이로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후안 싱: (서두가 제법 흥미롭다. 손으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리다가 양 팔로 테이블을 가볍게 짚은 채 말한다.) 재밌네. 어떤 사람인데?
슈에 펑: (꼭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가 역력하다.) 이름은 몰라. 항상 모습도 바꾸지. 그래서 내가 알아볼 수 없기는 한데, ...
그렇지만 사랑해.
사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신없이 중얼거리는 소리.)
후안 싱: 꼭 달 같은 존재구나. (딛고 있는 땅을 시선했다가 고개를 든다.)
어쩌다가 그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와중에 저런 표정은 제법 새로워 그 점 또한 흥미로웠고.)
슈에 펑: 나도 모르겠어. 내 사랑은 언제나 재앙이었거든. (테이블 위에 놓인 만을 주시하던 눈동자. 고개를 돌려 제 근처에 자리한 사내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번에는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안 싱: 함께. (자연스럽게 총으로 손을 뻗어 신기한 것을 발견한 아이 마냥 쥐어본다.) 그렇게 되면 너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니?
슈에 펑: 왜 아니겠어.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거, 그보다 기적 같은 일은 없는데.
이상한 일입니다. 후안 싱이 손을 뻗어 총을 쥐어보려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마치 신기루처럼 통과해 만져지지 않습니다.
슈에 펑: 이것은 내 거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도 할일이 있거든. (사내의 손이 닿으려했던 총을, 집는다.)
후안 싱: 그거 아쉽네. 보기에 이뻐보여 구경하려 했는데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도 재밌는 걸 찾았는데. 볼래?
슈에 펑: 그래, 보여주련.
후안 싱: (손에 쥐고 있던 세 개의 동전을 내민다.)
이거 뭔지 아니? 오는 길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슈에 펑: ...
네가 나를 놀리는구나.
무엇을 보라는 거야. 마술이라도 보여줄 생각이니.
후안 싱: ...? (손 안에서 동전을 잘그락여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면 그냥 주먹 잼잼 하는 걸로 보일테지만.)
슈에 펑: 하여간 못 말리겠어. 예전부터 그랬지만. (웃음을 흘린다.)
기왕 이리 왔으니 하나 물어볼게.
후안 싱: 응, 물어봐. (동전은 다시 주머니로 돌아간다.)
슈에 펑: 네가 만일 정말로, 깊은 사랑을 한다면 말이야.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 것 같아?
후안 싱: ... .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간다.) 그거야. 내가 가진 모든 소유가 오롯이 그의 것이 되는 지경 까지. 아니겠니.
슈에 펑: 나도 그래.
슈에 펑은 짧은 대답과 함께, 총을 장전합니다.
슈에 펑: 그럼 안녕.
후안 싱, 듣기 다이스를 굴려주세요.
후안 싱:
듣기
기준치:85/42/17
굴림:86
판정결과:실패
발포음 때문이었을까요? 짧은 인삿말은 묻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슈에 펑은 말릴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총을 입 안에 넣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슈에 펑의 머리에선 피 대신 하얀 벚꽃이 피어납니다. 이 조용한 행성에서 총 소리는 너무도 강렬해서, 후안 싱의 몸까지 깨부숴버리고 맙니다.
/
네 번째 달
/
나의 세계는 너로 세워지고 무너진다
모른 척 하고 있잖아
아무래도 좋을 결말 따위
...
후안 싱은 다시, 눈을 뜹니다. 몇 번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요? 이번에도 역시, 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바닥에는 원고지가 이리저리 놓여 있습니다. 둘러보면 종이가 이곳저곳 흩어져 있는 걸 발견합니다.
후안 싱: (피어나던 벚꽃이 눈 앞에서 아른거렸다. 아름답다 생각하고 있었을 적, 바스락이는 종이가 궁금해 가장 가까운 곳의 몇 장을 주워본다.)
원고지, 혹은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후안 싱이 종이를 줍기 위해 몸을 굽혔을 때, 역시나 주머니가 묵직해진 것을 느낍니다.
후안 싱: 이번에는 4개려나. (중얼거리며 주머니의 것을 꺼내본다.)
예상과 어긋남 없이, 4개의 은 동전이 후안 싱의 손 위에 올려져있습니다.
저멀리서 긴 소파에 누워 원고지를 보는 슈에 펑이 보입니다. 다가가볼까요?
후안 싱: (저건 보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너는 종종.)
(일부러 몇 개의 종이를 밟아 사박이는 소리를 내며 다가간다.)
슈에 펑: (사내가 내는 인기척에도 고개만 살짝 들어올려 뉘인지를 확인하고 다시 원고지에 시선을 빼앗긴다.) 곡주야, 어쩌니.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아. 분명 글을 써야하는데 말이야.
참, 그렇지. (그제서야 상체를 올려 일어나며 제가 손에 쥔 원고지를 구겨 던진다.) 네가 하나 써주면 되겠다.
후안 싱: (던져진 종이를 받고는 그의 다리 근처에 걸터앉으며 낄낄댄다.) 어지간히 이야기가 안 나와서 화가 났나보구나. 내게 이리 구겨서 주고 말야.
무얼 써줄까.
슈에 펑: (무릎을 굽혀 다리를 접어내니 한 사람 정도야 수월히 앉을 수 있을 자리가 난다. 한쪽 구각을 올려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본다.)
주제는 [달]과 [사랑], 그리고 [죽음]이야.
한 문장이라도 좋아.
후안 싱: 와, 그거 어렵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앉고는 구부러진 무릎에 손을 턱 올려둔다.) 펜이 없는데, 내가 말하면 네가 듣는 걸로 족하겠니?
슈에 펑:  해봐, 자기야.
후안 싱: 태양이 눈부셔 그것의 그림자를 사랑하고자 한 것이 어쩔 수 없는 착각 이었음을, 누군가는 죽음으로 가는 길 에서야 깨달았다.
마음에 드니.
후안 싱이 구절을 읊으니, 문장이 절로 원고지 위에 새겨집니다.
슈에 펑: (잠시간 말이 없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결말은 있어?
후안 싱: 한 문장을 주었으니 결말은 네가 한 번 의견을 내어 보렴.
어떤 결말이 이 이름 없는 사내에게 어울리겠어? (상체를 돌려 그의 무릎에 제 턱을 괸 채 내려다보며 묻는다.)
슈에 펑: (제게 살가운 그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짧은 머리칼과, 옅은 수염이 난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쓸어내린다.) 죽음만이 그에게서 사랑을 앗아갔지.
슈에 펑이 이야기를 이으니, 그것이 후안 싱이 지은 문구 아래로 새겨지다가도 갑작스레 불길이 솟으며 종이는 타버리고 맙니다.
어디선가 슬퍼하는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땅이 얕게 떨리고 있습니다. 우는 건 달인 걸까요?
'슬퍼하지 말아줘.' 그렇게 읊조린 슈에 펑은 그대로 안개처럼 흐트러져 사라집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후안 싱 역시, 흩어지고야 맙니다.
/
다섯 번째 달
/
나는 자꾸만 더 야위고 깊어만 지네
날카로운 달빛에
후안 싱이 깨어납니다.
바닥은 바다와 같은 푸른색이 되어 있습니다. 그 빛을 오래 보고 있자니, 깊은 슬픔이 느껴집니다.
후안 싱, 민첩 다이스를 굴려주세요.
후안 싱:
민첩
기준치:60/30/12
굴림:37
판정결과:보통 성공
알 수 없는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으나, 후안 싱은 금세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심해의 색은, 무척이나 익숙한 색이었으니까요.
후안 싱, 주머니 속을 뒤져볼 수 있습니다.
후안 싱: (다섯개의 동전을 기대하고 주머니를 뒤져본다.)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주머니에서 동전 다섯 개가 발견됩니다. 은으로 된 동전. 아까와 같은 모양입니다.
후안 싱: 대체 이것들은 어디에 쓰는 걸까. 응? 뱃삯인가.
푸른 땅 위로, 노란색 튤립이 줄을 이어 피어있습니다. 따라가볼까요?
후안 싱: (정체 모를 노래를 흥얼거리며 꽃길을 따라간다. 마치 고흐의 명화 중 하나를 연상시키는 길이 아닌가.)
샛노란 튤립은 점차 갈수록, 갈수록 색이 옅어집니다.
결국 길 끝에 다다랐을 때에는 명화를 연상시키던 금빛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완전히 하얀 튤립이 되어있습니다.
튤립이 안내한 길, 슈에 펑이 후안 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슈에 펑: (예의 보았던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야위고 피폐해진 낯으로 길을 따라오는 후안 싱을 지켜보고 있다.)
후안 싱: ... 하. (한숨인지 웃음일지 모를 소리. 노랫소리는 끊기고 걸음은 그 모습이 가장 선명히 담길 거리까지 다가간다.) 어쩐 일이니. 오늘이 그믐 이었던가?
슈에 펑: (그늘진 눈동자가 설핏 웃은 것도 같다.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벙긋거리지만 어떠한 말도 뱉어지지 않는다. 그저 입모양 뿐.)
후안 싱: 응? (내 귀가 먹어 들리지 않은건가 싶어 고개를 기울여본다.) 안 들려, 선주야.
슈에 펑: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그에게로 손을 뻗는다.)
후안 싱: (손이 길을 타고 제게 닿을 수 있게 팔뚝을 손 끝으로 끌어당긴다. 마치 이 정도는 괜찮다는 양.) 그믐을 맞은 네 말은 내게 닿지 않을 모양이다. 우리 선주 목소리는 참 고왔는데 내가 아쉽네.
슈에 펑: (체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피부를 지녀, 그의 손을 시리게 한다. 그가 제게 닿았을 때에서야 간신히 한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후안 싱,
(쇳소리와 같은 목소리가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섞였다.)
슈에 펑이 후안 싱의 이름을 부르자, 마치 살결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물이 되어 그는 아래로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쏟아지고 맙니다.
익숙한 감각이 후안 싱을 드리웁니다.
/
여섯 번째 달
/
내게 상처 주게 허락 할 테니
다시 걸어보게 해줘 사랑에
난 이미 손 쓸 수 없게 돼버렸지만
멋대로 그대를 원하고 있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냐
난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지만
짧은 이명 끝에, 후안 싱은 다시 눈을 뜹니다.
주위는 어둑어둑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하늘에는 아무것도 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 멀리 보이던 고향의 행성이나, 별마저도.
완전한 암흑이 자리합니다.
후안 싱은 자신의 손에 여섯 개의 동전이 들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동전들은 형형한 빛을 내어 주위를 밝힙니다.
슈에 펑은 어느 새 다가와 소리 없이 후안 싱의 곁에 서있었습니다.
그는 또다시 흠뻑 젖어든 모습입니다.
뺨과 목덜미에는 자잘한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고급스런 원단을 자랑하던 옷가지조차 형편없이 찢어져 누더기처럼 보입니다.
슈에 펑: 후안 싱. (상태와는 달리, 낮고 평이한 목소리로 사내를 부른다.)
후안 싱: (한참을 바라보고, 그저 시선했다. 눈을 몇 번 깜박였을까.) 꼭 귀신같은 몰골이야. 선주야.
그래. 왜 불렀니.
슈에 펑: 이제 에서 내릴 시간이 됐단다.
걱정하지마, 나는 괜찮으니까.
후안 싱, 교육 다이스를 굴릴 수 있습니다.
후안 싱:
교육
기준치:80/40/16
굴림:39
판정결과:어려운 성공
후안 싱은 알고 있습니다. 그의 괜찮다는 말은 결코 단 한번도 진실이었던 적이 없다는 걸.
새파랗게 질린 입술, 내리감은 눈꺼풀 아래로 자리한 절망. 춥다며 후안 싱을 붙잡던 그 간절했던 손길마저 여전히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후안 싱: (섣불리 손을 건네지 않았다. 너는 종종 내가 닿으면 사라졌으므로.)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니?
슈에 펑: ...그래.
나는 이 곳에 남아야지.
후안 싱: 어째서일까. (뻔히 그 몰골 보고있으면서도.) 돌아갈 길은 아주 잃어버렸고?
슈에 펑: 하.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다.) 말하지 않았니, 후안 싱.
이 곳에는, ..
나를 사랑해주는 이가 있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
후안 싱: 그러면 너를 사랑해주는 이가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도 있으면 그리로도 갈 수 있다는 말이겠구나.
슈에 펑: ... ... .
결코 네가 나를, 사랑할 거란 말은 하지말아. (이미 그것을 수 년동안 바라오고, 또 후회하며 속이 갈기갈기 찢어졌던 것은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했다. 죽음이 그에게서 사랑을 앗아가기 전까지.)
(내게 더는 잔인해서는 안 된다.)
후안 싱: (조용히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웃음에 많은 것이 담긴 것을 너는 알까. 선주야, 슈에야. )
(나는 네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었단다, 단 하나, 사랑만 제하고서.)
(참 세상이 잔인하지 않니.)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테지.
슈에 펑: 알아.
...알아.
(비참한 수긍이다. 너는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고, 그렇기에 내게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할수록 절망한 것은 나였으니. 너는 나를 상처입히는 법밖에 몰랐다.)
이제 나를 보내줘.
내가 널 떠나도록 허락해. 내게 마지막으로 명령해. 후안 싱. 너를 버리도록.
후안 싱: (그러니 결국 너는 나의 죄이고, 나는 너의 죄가 될 것이다. 그렇지.)
슈에 펑, 이제 그만 뒤를 돌아.
후안 싱은 슈에 펑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립니다.
이제 그만 뒤를 돌아.
슈에 펑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집니다. 아니, 바닷물이었을까요?
그리고 말합니다.
사랑했어.
내 사랑.
그것만이 나의 잘못이었지.
슈에 펑은 점점 스러져 사라집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 또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감각이 돌아오는 걸 느낍니다.
당신은 익숙한 곳, 홍콩의 부둣가에서 깨어납니다. 백일몽이었을까요?
후안 싱은 이내 휴대폰에 남은 <선주>의 전화번호를 삭제합니다.
이제는 그 아름답고 처절했던 사랑마저 끝이 났을까요.
후안 싱은 부둣가에서 발걸음을 옮겨 도시의 불빛 속으로 사라집니다.
END 2. 사랑은 아름답기만 해서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